다나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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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베 마코토는 1922년 군마현에서 태어나, 마에바시 우체국에서 근무하며 노동 운동을 시작했다. 1955년 군마현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60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사회당 내에서 우파 중진으로 성장했으며, 국회대책위원장, 서기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당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의 변모를 이끌었다. 1989년 사회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PKO법안 처리 과정에서 당내 갈등을 겪고 1993년 위원장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2005년 민주당 군마현 상임고문이 되었고, 2015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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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베 마코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다나베 마코토 |
원어 이름 | 田邊 誠 |
출생일 | 1922년 2월 25일 |
출생지 | 군마현 마에바시시 |
사망일 | 2015년 7월 2일 |
사망지 |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
학력 | 구제 체신관청연습소 (현재 우정대학교 중앙우정연수센터) |
전직 | 체신성 직원, 전체신노동조합 군마지구위원장 |
소속 정당 | 일본사회당 사회민주당 구 민주당 민주당 |
작위 및 훈장 | 종3위, 훈1등욱일대수장 |
의회 경력 | |
직함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구 군마 1구 |
당선 횟수 | 10회 |
임기 시작 | 1967년 1월 30일 |
임기 종료 | 1996년 9월 27일 |
직함 2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2 | 구 군마 1구 |
당선 횟수 2 | 1회 |
임기 시작 2 | 1960년 11월 21일 |
임기 종료 2 | 1963년 10월 23일 |
정당 활동 | |
직함 | 일본사회당 위원장 |
대수 | 제11대 |
임기 시작 | 1991년 7월 23일 |
임기 종료 | 1993년 1월 6일 |
지방 의회 경력 | |
직함 | 군마현 의회 의원 |
선거구 | 마에바시시 선거구 |
당선 횟수 | 1회 |
임기 시작 | 1955년 4월 23일 |
임기 종료 | 1959년 3월 |
2. 생애
1922년 군마현 마에바시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다나베 쿠마조(田邊熊蔵)는 노인 복지 사업에 종사하였다. 구제 마에바시 중학교(현 군마현립 마에바시 고등학교)를 졸업 후[6], 구제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아버지의 양로원 운영난으로 학비가 무료인 체신관리연습소에 진학했다. 연습소 졸업 후, 마에바시 우체국(前橋郵便局)(前橋中央郵便局)에서 근무했다.[6] 1943년 징병되어 군 복무를 하였는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잦은 구타를 당했다.[6]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마에바시체신국에 복직했다. 상사에게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태도를 본 노동조합 측에서 다나베를 영입하여 곧 지도자가 되었고, 전국체신노동조합 군마지구위원장과 군마지방노조평의회 의장을 역임했다.[6]
1955년 군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현의원이 돼서 댐 건설 과정에서 비리를 추궁해 기타노 시게오(北野重雄) 현지사의 재선을 막는 데 기여했다.[6] 1960년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일본사회당 공천을 받고 출마해 당선돼 국회의원이 되었다.[6] 1963년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1967년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된 후 은퇴할 때까지 계속 당선되었다.
다나베 마코토는 1960년 총선에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중의원 사회노동위원회에 소속되어 사회복지 정책 충실을 주장했다.[7] 1963년 총선에서는 낙선했지만, 1967년 총선에서 당선된 후 정계 은퇴 시까지 연속 당선되었다. 사회당 내에서는 에다 사부로 파벌에 속했고, 당내 우파의 중진으로 성장했다.[7]
1977년 사회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하여 자유민주당 가네마루 신 국대위원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대 정치를 펼쳐나갔다.[7] 이를 통해 사회당이나 시민운동가들의 요구를 자민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7] 1981년 1월 당내 우파 그룹인 수요회를 중심으로 정권구상연구회 결성에 참여했다. 1982년 7월 히라바야시 다케시 사망 후 서기장 대행을 맡았고, 1983년 7월 이시바시 마사시 위원장 체제에서 서기장에 유임되었다.
1985년 12월 당대회에서 다나베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신강령을 제안했고, 사회주의협회의 분란을 겪어 1986년 1월 정식으로 채택되면서 사회당은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86년 7월 양원 동시 선거에서 사회당이 대패하자 이시바시는 위원장에서 물러났고 다나베도 연대 책임을 지고 서기장을 사임했다.
다나베 마코토는 1986년 7월 양원 동시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대패한 뒤 서기장에서 사임했다. 1989년 도이 다카코 위원장에 의해 부위원장으로 지명되었다. 제12회 통일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도이는 위원장에서 사임했고, 다나베가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이는 가와카미 조타로 이후 26년 만의 우파 출신 위원장이었다.
다나베는 자민당 및 중도 정당에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사회당을 정권 담당 능력이 있는 정당으로 변화시킬 인물로 기대를 받았다. 이를 위해 당내에 그림자 내각을 설치하는 등 정권 교체를 위한 노력을 했다.
1992년 「국제연합 평화유지활동 등에 대한 협력에 관한 법률」(PKO법)안 처리 과정에서, 다나베는 당내 좌파와 갈등을 겪었다. 자위대가 아닌 별도의 조직을 파견하는 대안에 호의적이었으나, 자민당, 공명당, 민사당의 반대와 당내 좌파의 반발로 PKO법안에 반대로 돌아섰다. 결국 자민당과의 협상은 실패했고, PKO법안은 중의원을 통과했다.
같은 해 7월 제1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회당은 PKO법에 찬성했던 공명당, 민사당과의 선거 협력을 계속하는 모순 등으로 인해 패배했다.
참의원 선거 패배와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으로 실각한 가네마루 신과의 관계로 인해 이미지가 악화되자, 1993년 1월, 다나베는 야마하나 사다오에게 위원장직을 이양하고 사임했다.
1993년 55년 체제가 성립한 이후 처음으로 자민당이 야당으로 밀려나고 호소카와 내각이 수립되었다.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장 야마기시 아키라는 다나베를 중의원 의장으로 추천했지만, 신생당의 오자와 이치로 등의 지지를 받은 도이 다카코가 의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나베는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그렇기에 자사사 연립 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했을 땐 내각과 거리를 뒀다. 1996년 9월 민주당 설립위원회에 참여했지만, 그해에 있었던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 같은 해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8] 1997년 6월 19일 일본사회당의 후신인 사회민주당을 탈당한 뒤 민주당에 입당했다.[9] 2005년 2월 민주당 군마현 상임고문이 되었다.
다나베는 1990년 가네마루와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회담한 적이 있었다. 이후 북한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후 납북 일본인 문제가 불거지자 북한이 자신을 속였다며 항의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11]
2. 1. 초기 생애 및 노동 운동
1922년 군마현 마에바시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다나베 쿠마조(田邊熊蔵)는 노인 복지 사업에 종사하였다. 구제 마에바시 중학교(현 군마현립 마에바시 고등학교)를 졸업 후[6], 구제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아버지의 양로원 운영난으로 학비가 무료인 체신관리연습소에 진학했다. 연습소 졸업 후, 마에바시 우체국(前橋郵便局)(前橋中央郵便局)에서 근무했다.[6] 1943년 징병되어 군 복무를 하였는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잦은 구타를 당했다.[6]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마에바시체신국에 복직했다. 상사에게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태도를 본 노동조합 측에서 다나베를 영입하여 곧 지도자가 되었고, 전국체신노동조합 군마지구위원장과 군마지방노조평의회 의장을 역임했다.[6]2. 2. 정치 입문 및 현의원 시절
1955년 군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현의원이 돼서 댐 건설 과정에서 비리를 추궁해 기타노 시게오(北野重雄) 현지사의 재선을 막는 데 기여했다.[6] 1960년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일본사회당 공천을 받고 출마해 당선돼 국회의원이 되었다.[6] 1963년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1967년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된 후 은퇴할 때까지 계속 당선되었다.2. 3. 중의원 의원 시절
다나베 마코토는 1960년 총선에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중의원 사회노동위원회에 소속되어 사회복지 정책 충실을 주장했다.[7] 1963년 총선에서는 낙선했지만, 1967년 총선에서 당선된 후 정계 은퇴 시까지 연속 당선되었다. 사회당 내에서는 에다 사부로 파벌에 속했고, 당내 우파의 중진으로 성장했다.[7]1977년 사회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하여 자유민주당 가네마루 신 국대위원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대 정치를 펼쳐나갔다.[7] 이를 통해 사회당이나 시민운동가들의 요구를 자민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7] 1981년 1월 당내 우파 그룹인 수요회를 중심으로 정권구상연구회 결성에 참여했다. 1982년 7월 히라바야시 다케시 사망 후 서기장 대행을 맡았고, 1983년 7월 이시바시 마사시 위원장 체제에서 서기장에 유임되었다.
1985년 12월 당대회에서 다나베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신강령을 제안했고, 사회주의협회의 분란을 겪어 1986년 1월 정식으로 채택되면서 사회당은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86년 7월 양원 동시 선거에서 사회당이 대패하자 이시바시는 위원장에서 물러났고 다나베도 연대 책임을 지고 서기장을 사임했다.
2. 4. 일본사회당 위원장 시절
다나베 마코토는 1986년 7월 양원 동시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대패한 뒤 서기장에서 사임했다. 1989년 도이 다카코 위원장에 의해 부위원장으로 지명되었다. 제12회 통일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도이는 위원장에서 사임했고, 다나베가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이는 가와카미 조타로 이후 26년 만의 우파 출신 위원장이었다.다나베는 자민당 및 중도 정당에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사회당을 정권 담당 능력이 있는 정당으로 변화시킬 인물로 기대를 받았다. 이를 위해 당내에 그림자 내각을 설치하는 등 정권 교체를 위한 노력을 했다.
1992년 「국제연합 평화유지활동 등에 대한 협력에 관한 법률」(PKO법)안 처리 과정에서, 다나베는 당내 좌파와 갈등을 겪었다. 자위대가 아닌 별도의 조직을 파견하는 대안에 호의적이었으나, 자민당, 공명당, 민사당의 반대와 당내 좌파의 반발로 PKO법안에 반대로 돌아섰다. 결국 자민당과의 협상은 실패했고, PKO법안은 중의원을 통과했다.
같은 해 7월 제1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회당은 PKO법에 찬성했던 공명당, 민사당과의 선거 협력을 계속하는 모순 등으로 인해 패배했다.
참의원 선거 패배와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으로 실각한 가네마루 신과의 관계로 인해 이미지가 악화되자, 1993년 1월, 다나베는 야마하나 사다오에게 위원장직을 이양하고 사임했다.
2. 5. 위원장 사임 이후
1993년 55년 체제가 성립한 이후 처음으로 자민당이 야당으로 밀려나고 호소카와 내각이 수립되었다.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장 야마기시 아키라는 다나베를 중의원 의장으로 추천했지만, 신생당의 오자와 이치로 등의 지지를 받은 도이 다카코가 의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나베는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그렇기에 자사사 연립 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했을 땐 내각과 거리를 뒀다. 1996년 9월 민주당 설립위원회에 참여했지만, 그해에 있었던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 같은 해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8] 1997년 6월 19일 일본사회당의 후신인 사회민주당을 탈당한 뒤 민주당에 입당했다.[9] 2005년 2월 민주당 군마현 상임고문이 되었다.다나베는 1990년 가네마루와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회담한 적이 있었다. 이후 북한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후 납북 일본인 문제가 불거지자 북한이 자신을 속였다며 항의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11]
2. 6. 대북 관계
2. 7. 사망
다나베 마코토는 2015년 7월 2일 향년 93세로 사망했다.3. 정책 및 활동
3. 1. 난징 대학살 기념관 건설 요청 논란
하마다 고이치에 따르면, 다나베는 1980년대에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난징시를 방문했을 때 ‘난징대학살기념관 건설을 요청했다’고 한다.[14] 하마다는 이 요청과 총평으로부터 난징시에 대한 3000만 엔의 기부에 의해 기념관이 건설되었다고 말하고 있다.[14] 그러나 1999년 11월과 12월 아라 켄이치의 인터뷰에서 다나베는 "진주만 50주년을 맞아 일본의 반성을 언급한 적은 있지만, 난징 사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므로 중국에 대해 난징 사건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15]3. 2. 나리타 공항 문제
오가와 신스케(小川紳介) 프로덕션 제작의 『미사토자카 제2요새의 사람들』에서 공항 반대파가 농성하는 토지의 나무에 다나베 명의의 확인표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역대 선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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